[아브라카'탈브라'②] 처음 브라를 벗고 잔 날 악몽을 꿨다
입력: 2019.07.29 05:00 / 수정: 2019.07.29 05:00
브라는 액세서리일 뿐이라는 소신으로 화제가 된 배우 설리. /설리 SNS
"브라는 액세서리일 뿐'이라는 소신으로 화제가 된 배우 설리. /설리 SNS

때 아닌 '브라자 논쟁'은 몇몇 여성 연예인의 사소한 에피소드에서 불붙었다. "민망하다." "예의없다." 수많은 비난이 뒤따랐다. 그러나 우리들은 왜 여성에게만 신체 일부를 가리도록 사회적 의무를 지우는 지는 묻지 않는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도 한 중학교 여성 교사가 상반신 노출 사진이 유출됐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이 교사는 연방정부에 성차별로 소송을 제기했다. 만약 남성이었어도 해고됐을지 의문이다. 앞으로 여성은 사회적 물의를 피하고 미풍양속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가슴을 조이고 살아가야 할까. 이에 더팩트는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며 '탈브라'를 실천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획 '아브라카탈브라'를 2회에 걸쳐 선보인다. '아브라카탈브라'는 마법 주문인 '아브라카다브라'를 '탈(脫)브라'로 변형한 조어다. <편집자주>

소화불량·피부병에 주변 시선까지…"의무 아닌 선택 돼야"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여성의 브래지어(이하 ‘브라’) 기원은 고대까지 올라간다. 로마 시대에 지금의 브라 형태를 갖춘 아포대즘(apodesm)을 입은 여성의 모자이크로 확인할 수 있다. 고대 사회 여성들은 벗은 상반신에 긴 천이나 가죽 등으로 가슴 부분을 가린 채 활동했다. 21세기인 지금도 여성의 가슴은 옷과 브래지어 속에 꼭꼭 감춰져 있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여성에게 브라는 2차 성징이 시작되는 10대 초반부터 노인에게도 필수적인 존재다.

그래서일까. 배우 설리(25·본명 최진리)는 최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브라를 입지 않은 ‘노브라’(No bra) 사진을 올려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어 방송에 나와 "브라는 액세서리일 뿐"이라는 소신을 밝혀 일파만파로 번졌다. 이달 7일에는 아이돌그룹 마마무 멤버 화사(24·본명 안혜진)가 노브라 차림으로 공항에 나타나 포털사이트 실시간 1위에 오르며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남녀 모두 가슴이 있는데 브라 착용을 여성에게만 강요할 수 없다는 의견과, 같은 여성이 보기에도 민망하다는 비난 여론이 줄을 이었다.

<더팩트>는 우리 일상 속 또 다른 ‘설리’와 ‘화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7월 22~25일 서울에서 임의로 10~30대 여성 16명을 취재했다. 누군가는 이미 노브라 생활을 한지 오래였고, 누군가는 어깨에 피멍이 들면서도 브라를 착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성들이 지금 이 순간 브라를 착용하고 있을지는 각자의 사정이다. 그러나 이들이 전한 키워드는 같았다. "불편함", "강제적", "차별", "성 상품화" 등이다.

◆"엄마, 가슴이 이상해!" 그때부터 브라는 의무가 됐다

대학생 권모(19) 씨는 어린 시절 브라와 ‘어물쩍’ 처음 만났다. 가슴에 멍울이 잡힌 10대 초반의 일이었다. 권씨의 어머니는 놀란 딸에게 "너도 이제 때가 됐구나…"라며 '주니어 브라'를 입혔다. 권씨는 "남자도 유두가 있는데 왜 여자만 브라를 입어야 할까"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깊은 분석을 하기에 너무 어렸다. 가족과 학교는 가슴이 나오기 시작했으니 당연히 브라를 차야 한다고 성화다. 이 때문에 많은 10대 여성이 수동적으로 단단한 와이어가 명치를 조이는 브라와 첫 만남을 가진다.

많은 여성을 브라와 만나게 해주는 매개체는 ‘엄마’다. 딸의 가슴 발달은 "이제 브라를 살 때가 왔다"는 결심과 이어진다. 최근 스스로 불편함을 자각해서, 또는 여성인권 차원에서 노브라를 택하는 여성이 많다. 그렇게 집을 나서는 딸과 엄마는 늘 갈등을 빚는다. 지난해 여름부터 브라를 입지 않은 홍모(24) 씨는 지금도 엄마의 감시를 받는다. 홍씨는 "엄마는 집을 나설 때마다 제 유두가 튀어나오지 않았는지 유심히 보신다"며 "엄마에게 ‘엄마처럼 그렇게 유심히 보면 성희롱이야’라고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평생 브라 착용을 강요받은 엄마는 결국 ‘브라는 꼭 해야 돼'라고 결론을 낸다"고 했다. 하지만 홍씨는 브라에서 탈출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브라를 착용하는 내내 역류성식도염 등 소화질환을 달고 살았지만, 작년 여름부터 마법처럼 나았기 때문이다.

노브라를 택한 여성들이 브라에서 벗어난 많은 계기는 건강문제였다. 홍씨처럼 소화질환에 시달리는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금속 성분의 와이어와 후크가 같은 부위를 지속적으로 누르며 피부질환도 유발한다. 직장인 정모(30) 씨는 지난해 8월 퇴근 후 어깨에 피멍이 든 걸 봤다. 피멍 주변은 알레르기성 피부염으로 발갛게 상기됐다. 매일 정장을 입어야 하는 직장인 특성상 얇은 블라우스 안에 브라를 매일 착용한 결과였다. 노브라로 회사를 출근할 자신이 없었던 정씨는 편한 브라를 사려고 속옷매장에 들러 가슴 치수를 새로 쟀다. 무조건 편안함을 추구하는 고객에게 매장 직원은 "와이어 없는 브라를 하면 가슴이 처진다"며 "겨드랑이 살과 등살을 가슴까지 모아야 더 볼륨감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직원이 권한 브라는 하나같이 조이는 와이어에, 가슴살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는 두꺼운 패드가 있는 브라였다.

원래의 가슴보다 더 크고,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는 통념에 많은 여성들이 브라 착용을 강요받는다. 홍씨는 성장기에 가슴이 예쁘게 자리 잡는다는 이유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잘 때도 브라를 입고 잤다. 브라를 벗고 잠자리에 든 첫날, 그는 상반신을 벗은 채 교실에 앉아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악몽을 꿨다. 여성이 가슴의 ‘아름다움’을 포기한 순간 벌거벗은 것과 같다는 강박을 보여준다. 대학생 김모(23) 씨는 학창시절 무더운 여름에도 교복 블라우스 위에 걸친 아우터를 벗지 못했다. 김씨 뿐 아니라 교실에 있는 모든 여학생이 그랬다. 김씨는 "다들 사회가 시키는 ‘에티켓’에 따라 브라를 입었지만, 블라우스 속 브라가 비칠까봐 이마저도 가렸다. 같은 반 남학생들은 덥다며 자유롭게 옷을 벗었다"고 회상했다. 아름다움과 예의를 위해 브라를 입은 한편, 드러날 수밖에 없는 브라의 형태는 숨겨야 하는 아이러니다.

◆노브라? 이제는 "탈(脫)브라 입니다"

설리와 화사가 불을 지핀 논란에 힘입어 '탈브라'에 합류하는 여성이 늘어난다. 이들을 향한 대표적인 비판은 겉으로 드러난 유두가 성적불쾌감을 준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노브라 여성을 24일 과다노출 혐의로 입건된 ‘원주 티팬티남’과 견주기도 했다. 같은 달 강원도 원주시 한 카페에서 티팬티에 가까운 핫팬츠 차림으로 활보한 남성과 유두를 드러낸 채 일상생활을 하는 여성이 무슨 차이가 있냐는 것이다. 티팬티 남성 역시 혐의를 적용할지 갑론을박이 많지만, 전문가들은 여성이 브라를 하지 않아도 법적 문제는 전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여성의 노브라는 본인은 물론 상대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기 위한 행위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유두 노출을 굳이 법에 적용하자면 원주 사례처럼 경범죄 처벌법상 과다노출, 또는 형법상 공연음란죄 등이 있다. 현행법에서 규정하는 과다노출은 공개된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성기ㆍ엉덩이 등 신체의 주요한 부위를 노출하는 것이다. 옷까지 차려 입은 여성의 유두가 겉으로 드러났다고 제재할 법적 근거가 없다. 형법상 공연음란죄 역시 공공장소에서 불특정다수에게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킬 의도가 있어야 한다. 김태연 태연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여성의 유두는 현행법으로 다스릴 수 있다고 특정된 신체 부위가 아닐뿐더러, 성적 욕구를 불러일으키거나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행위도 아니다"라며 "이런 문제에서 죄로 의율하자는 여론이 나오는 것은 성차별적 발상"이라고 설명했다.

불법도 아닌데 일부 대중이 이토록 노브라에 반발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여성의 브라 착용을 당연시 하는, 이른바 디폴트(default, 기본 설정값)로 여기는 인식에 있다고 본다. 여성은 사회가 정한 기본값에 자신의 몸을 맞춰야 하고, 이를 어기면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윤김지영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이 논란의 기저에는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남성의 것이라는 남성중심적 사고가 있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있는 신체 부위인데도 여성만 브라를 차야 완전한 신체인양 억압한다"며 "여성이 브라를 찬 모습을 유(有)브라라 이름짓고, 현 상황도 노브라 논란이 아닌 탈브라 논란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지예 녹색당 공동 운영위원장/더팩트DB
신지예 녹색당 공동 운영위원장/더팩트DB

실제로 ‘탈브라’를 실천 중인 신지예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지난 5월 여느 때처럼 브라를 착용하지 않고 한 방송에 출연했다. 촬영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방송작가 등 몇몇 관계자들이 상급자에게 혼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신 위원장은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노브라’ 출연자를 방치해 혼나는 내용이었다"며 "브라 착용은 개인의 선택인데 우리 사회는 의무로 규정한다. 이 일이 있은 후 방송에 나갈 때는 브라를 입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고 했다.

신 위원장은 브라를 벗어던지는 여성들의 움직임을 "언젠가 남자도 아침에 불편하면 브라를 속옷함에서 꺼내 입는 시대를 만들기 위해"라고 봤다. 남녀를 불문하고 개인의 신체를 사회규범 차원에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을 무시한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신 위원장은 "흑인과 노동자 등 약자가 세상을 바꿀 때는 언제나 시끄러웠다"며 "아름다움과 예절을 위해 여성만 억지로 브라를 입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이 개인의 사정에 맞춰 브라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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